재일조선인인 이들은 1970~1980년대 국군보안사령부(군 보안사, 현 기무사)에 의해 간첩으로 몰린 피해자들이다. 재일조선인 2세 강종헌씨는 서울대 재학 중이던 1975년 11월, 영장 없이 연행되었다가 38일 동안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고문수사를 받았다.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일본에서 북한으로 밀항하고, 국내에서 지하조직을 구성했다는 혐의였다. ‘순조롭게’ 기소되었다. 강씨는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고문당했다고 호소했지만 사형 판결이 확정됐다. 그 후 감형되어 1988년 12월, 13년 만에 가석방되었다.
2011년 10월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린 고등법원은 2013년 1월24일 간첩 혐의가 조작됐다고 인정했다. 1975년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본에서 모국으로 유학 온 재일조선인 청년 등을 간첩으로 조작해 공안 정국을 조성했다.
서울고등법원은 2014년 4월 김순일씨가 신청한 재심에 대해 개시 결정을 내리고, 같은 해 11월27일 김씨에게 ‘북한 방문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볼 수 없으며 간첩 혐의는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판단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심에서 보안사 수사관의 고문 사실이 밝혀지고 김씨의 무죄 가능성이 높아지자 검찰은 기소 요건을 변경해 ‘대한민국의 질서를 위협할 것을 인식하면서도 감행한 방북’을 금지한 국가보안법 조항을 적용했다.
하지만 법원은 남한과 북한 정부의 지지자가 함께 생활하기도 하고 ‘북송사업’을 통해 북한으로 건너간 일가친척에게 생활비를 송금하는 등 재일조선인 특유의 생활에 주목했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 성장한 재일조선인을, 한국 국적 소지자의 북한 방문을 금지한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동기씨는 1986년 8월 김포국제공항 출국장에서 보안사 수사관들에 의해 영장 없이 연행된 후 간첩으로 조작되었다가 누명을 벗지 못하고 2005년에 사망했다. 그는 재판받을 당시, 보안사에서 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허위 진술을 했다고 호소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1990년 5월, 5년간 복역 중이던 이씨는 김순일씨와 함께 특별 가석방되었다. 노태우 대통령 일본 방문 ‘특별 가석방’이었다. 1990년 5월 법무부는 노태우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앞두고 ‘재일동포 간첩’ 8명을 풀어주었다.
영화 〈남영동 1985〉가 알려준 사실
이동기씨의 유족은 2014년 2월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그로부터 1년여 지난 올해 2월3일 고등법원은, 사건 당시 공안 당국이 이씨가 기밀 탐지 목적으로 군에 들어왔다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39일 동안 불법 감금하고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가했다는 유족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생전에 이씨가 법정에서 호소했던 고문·날조 사실을 30여 년 만에 무죄로 인정받았다.
사실 이씨의 가족은 2013년까지 재심은 생각지도 못했다. 도쿄에 사는 이씨의 형 이정기씨가 우연히 영화 〈남영동 1985〉의 상영회 기사를 본 게 계기가 되었다. 2013년 7월6~7일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들이 영화 〈남영동 1985〉 도쿄 상영회를 개최했다. 고문·조작의 실태를 알리고, 어디선가 오늘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고문조작 사건 피해자를 돕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이정기씨가 연락을 해온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이정기씨는 도쿄에서 활동하는 ‘재일한국인 양심수의 재심 무죄와 원상회복을 쟁취하는 모임’ 관계자들을 만나 재심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이동기씨의 간첩 혐의를 벗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족은 즉시 재심을 청구했다. ‘재일한국인 양심수의 재심 무죄와 원상회복을 쟁취하는 모임’ 측은 이씨처럼 누명을 벗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거나 재심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피해자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강종헌·김순일·이동기, 세 사람을 포함해 현재 파악된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 재심의 무죄 확정자는 9월3일 현재 22명이다. 이 가운데 보안사가 조작한 간첩 피해자는 15명인데, 당시 국방부 소속이라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던 보안사가 중앙정보부 수사관의 명의를 허위 기재하는 식으로 수사권을 남용했다는 사실이 재심 과정에서 새롭게 밝혀지기도 했다.
피해자들에게 재판 과정은 잊고 싶은 과거와 대면하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건 집요하고 잔인했던 고문과 그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거짓 자백을 한 자신이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몇십 년 동안 고문당하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문을 일상 업무로 행했던 수사관들과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이라는 피해자들의 호소를 무시한 검사·판사들은 어땠을까?
가해자의 고백이나 반성의 목소리가 생략된 상황에서도 사건의 진상은 밝혀진다. 가해자가 나서서 피해자와 국가를 향해 고백하는 일은 당장은 고통스럽겠지만, 뒤늦게 가해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 후손이 입을 상처를 예방해주는 약은 가해자의 고백뿐이다. 나아가 이는 피해자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치유하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