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를 당에서 억지로 밀어낸다? 민주주의 나라에선 상상할 수 없는 후보 축출 운동이 내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미국 공화당에서 벌어지고 있다. 축출 대상은 지난 6월 대권 도전을 선언한 뒤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억만장자 기업인 도널드 트럼프(69)다.

공화당 지도부는 트럼프가 주요 현안과 관련해 보수 가치와 배치되는 주장을 펴는 데다 반이민·반자유무역주의 발언 등으로 끊임없이 논란을 빚자, 스스로 퇴진하기를 내심 바라왔다. 이런 당내 분위기는 최근 프랑스 파리 연쇄 테러 후 트럼프가 ‘당선 시 미국 내 시리아 난민의 퇴출과 이슬람 사원의 철거’를 주장하고, 9·11 테러 당시 미국 내 이슬람교도들이 환호하는 걸 봤다는 취지의 황당한 발언으로 파문이 커지면서 더욱 확연해졌다. 파리 테러 이후 안보 문제가 대선의 핵심 이슈로 급부상했는데도 안보 ‘문외한’인 트럼프의 지지율이 지속적이고 지배적으로 나타나자 당 지도부는 사실상 패닉 상태였다.

공화당 지도부가 전전긍긍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 추세로 보면 트럼프가 내년 여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공식 지명될 것이 확실시되고, 그 경우 민주당 대선 후보로 유력한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게 패하리라 보기 때문이다. 7년 전 민주당에 정권을 내준 뒤 백악관 탈환을 위해 절치부심해온 공화당 지도부는 이왕이면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혹은 온건파 현역 상원의원 마르코 루비오가 당 후보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두 사람의 지지율은 지난 몇 달 동안 한 자릿수를 맴돌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런데도 트럼프의 지지율이 고공비행을 거듭하다 보니 공화당 일각에서는 올해 초 대선 불출마를 공개 천명한 전 공화당 대선 후보 밋 롬니를 재영입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Reuters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11월24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

현재 공화당 지도부 차원에서 트럼프를 밀어내기 위한 조직적인 움직임은 없다. 하지만 공화당의 전·현직 정치인과 주지사, 보수 언론과 싱크탱크, 친공화당 정치헌금 기부자와 선거 전략가 등을 두루 아우르는 공화당 주류의 일부에선 트럼프를 대선 후보군에서 강제 퇴출시키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가장 먼저 총대를 멘 사람은 과거 공화당 전국위원회에서 온라인 홍보국장을 지낸 리즈 메어. 2008년 공화당 존 매케인 대선 후보의 참모를 지낸 그녀는 지난 9월 대선 후보에서 중도 하차한 스콧 워커 위스콘신 주지사를 도운 경험이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 보도에 따르면 메어는 트럼프 축출에 호의적인 기부자와 연계해 트럼프 퇴출을 위한 일종의 회사형 조직 트럼프카드 사(Trump Card LLC)를 만들었다. 트럼프카드 사는 트럼프 반대 광고를 위해 25만 달러의 모금을 목표로 하고 있다. 보수 방송인 〈폭스 뉴스〉 보도에 따르면 젭 부시, 마르코 루비오를 비롯해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후원자 가운데 최소 10명이 운동에 동참한 상태다.

트럼프카드 사 메모를 보면 트럼프에 대한 공화당 주류의 공포심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드러나 있다. 메모에는 ‘아무도 저지하지 않는 상황에서 트럼프가 스스로 물러나거나 축출될 가능성은 없다. 뭔가 극적이고 비상한 일을 도모하지 않고는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되는 건 기정사실이며, 그 경우 힐러리 클린턴이 차기 대통령이 되는 건 엄연한 현실이다’라고 결론짓는다.

ⓒAP Photo또 다른 공화당 대선 후보인 존 케이식 오하이오 주지사는 ‘트럼프 저격수’를 자처한다.

트럼프카드 사는 아이오와 주와 뉴햄프셔 주 등 내년 2월 첫 예비선거가 이뤄지는 주를 중심으로 라디오와 텔레비전 광고, 웹 비디오 등 각종 수단을 통해 동시다발로 트럼프를 축출하기 위한 ‘게릴라 운동’을 이미 시작했다. 광고에서는 대권주자로서 트럼프의 자질 미달을 보여주고, 공화당의 전통 가치와 거리가 먼 주장을 펼치는 장면을 내보냈다. 공화당 미디어 컨설턴트인 릭 윌슨은 “친공화당 기부자가 이 운동에 동참할 것이다. 트럼프가 공화당을 파괴하고 있고, 그가 나올 경우 내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에게 패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공화당 사람들이 이제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라고 밝혔다.

메어 못지않게 반(反)트럼프 캠페인을 왕성하게 펼치는 사람은 또 있다. 공화당 출신 현역 오하이오 주지사로 지난 7월 대선 출마를 선언한 존 케이식(63)이 주인공이다. 트럼프에 대한 직접 공격을 자제해온 당내 다른 대선 후보들과 달리 케이식은 최근 텔레비전 토론에서 트럼프를 정면 공격한 데 이어, 자신의 트위터 계정과 현장 유세를 통해서 ‘트럼프 저격수’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의 선거캠프는 11월24일에도 위험 수위의 발언을 일삼는 트럼프를 나치에 비유한 비디오 광고를 공개했다. 특히 ‘미국의 새로운 날’이란 케이식 후원조직은 트럼프 축출을 위해 내년 2월 예비선거가 열리는 뉴햄프셔 주에서 250만 달러를 투입해 라디오와 텔레비전·우편·온라인 등으로 집중적인 반트럼프 캠페인을 벌일 계획이다.

이 단체의 맷 데이비드 대변인은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를 통해 “우리는 트럼프를 겨냥한 창끝이 될 것이다”라며 기염을 토했다. 이 단체가 최근 제작한 텔레비전 광고는 트럼프를 오바마 대통령과 나란히 보여주면서 “대통령직은 현장 교육을 통해 배워지는 게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트럼프의 자질 부족을 정면으로 유권자들에게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 단체는 문제의 광고 방송을 위해 60만 달러를 책정한 상태다. 그 밖에도 회원 10만명을 거느린 보수 단체로 세금 반대 운동을 주도해온 ‘성장 클럽’도 지난 9월과 10월 아이오와 주에서만 100만 달러에 달하는 반트럼프 텔레비전 광고를 내보냈다.

퇴출 움직임에도 오히려 기세등등

하지만 반트럼프 전선은 아직 초기 단계라 그다지 광범위하지는 않다. 이를테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핵심 참모였던 칼 로브가 만든 ‘미국의 기로’나 미국 상공회의소 등 주류 단체와 공화당 재정 후원가의 대대적인 동참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폴리티코〉에 따르면 최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공화당 주지사 회의에 참석한 친공화 재정 후원자 가운데 상당수가 “누군가는 그를 끌어내려야 한다”라는 공감대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공화당 주류 일각의 퇴출 움직임에도 트럼프는 오히려 기세등등하다. 그는 반트럼프 운동에 나선 단체를 제소하겠다고 위협했다. 자신의 퇴출 움직임이 본격화하자 그는 ABC 방송에 출연해 “더 두고 보겠지만, 공정한 대우를 바란다. 그렇지 않을 경우 무소속 출마를 배제할 수 없다”라고 경고했다. 트럼프는 자신이 대선 후보가 안 되더라도 무소속으로 출마하지 않고 당의 공식 후보를 지지할 것이라는 문서에 다른 후보와 함께 지난 9월 초 서명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 흐름대로라면 트럼프가 이 약속을 지킬 것으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미국 대선의 전초전인 예비선거가 내년 2월 아이오와 주와 뉴햄프셔 주에서 열리는 만큼 향후 3개월간 트럼프 진영과 반트럼프 진영은 이전투구식 싸움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어느 쪽이 승리하든 당 이미지는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대선 승리의 희망도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공화당 지도부가 큰 고민을 안았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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