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다는 것은 때로 삶을 밀고 나가는 일이다. 그 덕분에 삶의 빛깔이 바뀌고 일상의 밀도가 높아진다. 새 연재 "은유 읽다"는 책과 삶이 포개지는 순간을 포착해낸다. 다음 주에 게재될 "김현 살다"와 함께 격주로 독자들을 만난다. 은유 작가의 글은 좀 더 책에, 김현 시인의 글은 좀 더 삶에 가깝게 다뤄질 예정이다.
“엄마는 생일날 우리랑 안 있고 왜 친구 만나러 가?” 아이가 눈망울을 굴리며 물었다. 예상치 못한 기습 질문에 당황했지만 나는 면접에 임하는 사람처럼 성심껏 답했다. 우리는 매일 밥을 같이 먹고 외식도 자주 한다. 근데 생일에도 가족이 꼭 함께해야 하는 걸까. 엄마는 아빠나 너네들이랑 같이 있으면 자꾸 일하게 된다. 동생이 어리니까 밥 먹을 때도 반찬을 챙기게 되고 신경이 쓰인다. 일상의 연장이고 특별하지 않다. 엄마도 생일에는 마음 편히 보내고 싶다고.
나는 첫아이를 저렇게 질문이 가능한 ‘사람’으로 만들어놓고 둘째를 낳았다. 6년 만에 재개된 육아는 겨우 정돈된 일상을 쉽게 뒤집어버렸다. 내 일이 바쁠 때면 두 아이 손발톱 40개가 꼬질꼬질한 채로 자라 있곤 했다. 늘 동동거리느라 혼이 빠진 나는 틈만 나면 고요히, 단독자의 시간을 탐했다. 아이는 이해했을까. 가족이 아니라 노동을 거부하는 엄마의 마음을.
‘생일은 가족과 함께’라는 사회규범은 유니폼처럼 거추장스럽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함께하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다는 게 인간 행복의 관점에서 온당한지 잘 모르겠다. 외부가 없는 삶은 숨 막힌다. 평소에도 밥을 같이 먹는 식구인데 굳이 생일까지 모여야 하는지. 아마도 평소엔 밥상을, 생일엔 잔칫상을 받았던 아버지를 위한 가부장 문화의 잔재가 아닐까 추측한다. 그 수혜자가 아닌 뒷수발 드는 ‘안’사람 처지에서는 가족 ‘바깥’이 선물이다.
엄마가 되고 나면 사라지는 권리들. 자아실현이나 경력 단절보다 먹고 자고 누는 기본 생식 활동에 제동이 걸리는 게 나는 더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호텔 요리를 먹어도 아이가 옆에 있으면 맛을 느끼지 못했다. 아이를 두고 나오면 걱정되고 데리고 나오면 성가시고. 첫 수저를 뜨려는 찰나 아이의 ‘응가’ 한마디면 식사의 흐름이 끊긴다. 밥이 허용되지 않는 엄마의 시간. 그뿐인가. 백화점 여성용 화장실 칸 내부에는 접이식 아기 의자가 달려 있다. 몸을 못 가누거나 멋대로 돌아다니는 영·유아를 동반한 고객을 위한 장치다.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도 아이를 그림자처럼 달고 다녀야 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타인의 도움 없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생명이란 것을 알고 나면 그 생명을 키우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된다(130쪽).” 그것을 출산 전에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다. 타인의 도움 없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한 생명이 다른 한 생명의 일상을 어떻게 바꾸어놓는지, 몰라서 낳는다. 그리고 키우면서 알아간다. 어디로도 도망칠 거리가 확보되지 않는 참 곤란한 관계를 출산과 양육을 통해 경험하는 것이다.
그 무수한 날들, 너무도 모질어서 존재가 공글려지는 시간이 흘렀고 아이들은 자랐다. 지난해 내 생일엔 군 입대를 앞둔 아이에게 미역국을 끓여달라고 부탁했다. 올해는 아직 어린 둘째가 오빠를 대신해 미역국을 차려주었다. 그냥 한번 말해보았는데 밥이 나왔다. 나는 ‘남편 재교육보다 자녀 출산 후 교화가 빠를 수 있다’는 교훈을 공유한답시고 페이스북에 인증 샷을 올렸다. 비혼 친구에게 먼저 반응이 왔다. 좋겠다, 부럽다를 연발한다. 난 스마트폰 계산기를 켰다. 20년, 365일, 세끼를 곱하니 2만1600끼 만에 한 끼가 돌아온 셈이다. 배불리 먹었고 자랑도 했으나 썩 부러워할 일은 아닌 거 너도 알지 않느냐고 말했다. 친구도 선뜻 인정. 이러한 극단적 비대칭 관계를 모성으로 숭앙하는 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자식 키운 보람 따윈 됐고요 육아 수당이나 주세요, 여성들이 요구하는 시대로 변하는 중이다.
엄마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난 그래도 엄마가 됐을 거 같다. 아이를 무작정 좋아하는 데다가 한 생명을 키우는 데 필요한 재화와 노동의 총량에 대한 정보는 알아도 구체적인 실감은 어려우니까 용감하게 출산의 길을 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 놓고 여전히 생일날 온전한 식사를 위한 외출 이용권과 효행 미역국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하는 심정으로 살았으리라.
이러한 내 부산스러운 행동과 생각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낳을 자유’다. “부모를 골라서 태어날 수 없는 아이들의 평등을 지켜주는 공적 자원(281쪽)”과 “아이를 낳지 않고 싶은 여성이 비난받지 않을 자유(283쪽)”가 확보된 상태. 특정 상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헌신하지 않는 관계 맺음이 가능하도록 가족제도가 개선될 때까지, 나는 무한한 모성을 강요하는 세상의 모든 면접관들에게 말씀드릴 작정이다. 엄마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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