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쌍용차 해고 노동자 연구모임 뒤풀이에서 술잔이 연거푸 도는 동안, 김승섭 교수(고려대 보건과학대학)와 연구팀 소속 박주영씨의 속내는 복잡했다. ‘하고 있는 일에 손배·가압류 연구까지 추가할 수 있을까.’ 도무지 낼 수 없는 시간을 마음속으로 쪼개고 또 쪼개봤다. 고민에 비해 싱거운 결론이 났다. “해봅시다. 기술적인 부분은 저희에게 맡기세요.”
앞장서서 투쟁하는 ‘아빠들’은 “어차피 나를 죽여도 가져갈 수 없는” 큰 액수의 돈 앞에 애써 호기롭곤 했다. “복직되면”이라는 말을 다짐처럼, 부적처럼 품고 싸운다. 해고자의 아내이기도 한 권지영 ‘와락’ 대표는 그럴 때마다 한 번씩 속이 쓰리다. “아빠들은 밖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살림하는 사람은 안에서 얼마나 애가 탈까요. 저 집도 애가 있지 싶어 걱정되고. 근데 그게 아빠들 탓인가. 노동조합 활동을 했다고 수십억, 수백억원씩 물리는 게 이상한 거잖아요.”
당사자라고 두려움과 압박감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기업에서 제기한 손배 소송은 철회됐지만, 국가가 제기한 손배 소송이 남아 있는 김정욱 사무국장도 마찬가지다. “저는 가족의 지원도 받고 있고, 많은 동료들과 연대 속에 있는데도 이게 안 끝날 것 같다는 느낌이 한 번씩 확 올 때가 있어요. 그럼 몰래 숨어서 울기도 하고. 수십억원 원금에 매일 65만원씩 붙는다는 지연이자 같은 것들이 떠오르면 호흡이 깊어진다고 해야 할까, 삶에 대한 자신감이 조금씩 주저앉는 느낌이에요. 제가 이 싸움을 정리하고 나가서 다른 일을 시작한다 해도 손배·가압류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쉽게 요약되지 않는 고통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김승섭 연구팀’은 3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쳐 100여 개 문항을 만들어냈다. 국내 최초로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 실태조사가 시작된다. 신체 및 정신 건강과 경제적 상황을 살피는 것은 물론이고, 일반 노동자의 직장 내 경험과 비교해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의 상황은 어떻게 다른지, 이 경험이 가족 관계와 사회적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따져보기 위한 설문지는 25쪽 분량이다. 본격 조사 시작 전 설문을 자문해준 노동자 몇몇이 “학창 시절에도 안 해본 숙제를 다 한다”라며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손배·가압류는 노동권을 어떻게 제약하나
설문지를 받아든 조합원들은 묻는다. 이미 여러 차례 ‘실태조사’라는 명목으로 몇 번이고 응답해왔다. “이번에는 뭐가 좀 달라집니까”라는 질문에는 기대보다는 우려가 담겨 있다. 권지영 ‘와락’ 대표는 그 마음을 이렇게 헤아려본다. “내가 어떤 조사의 ‘결과값’을 내는 존재로만 쓰이고, 막상 해결은 안 되니까 이런 걸 하다 보면 대상화되는 느낌을 강력하게 받죠.”
연구팀은 설문지를 정교하게 만드는 일에 공을 많이 들였다. 보통의 노동자 건강 연구는 일터의 위험물질이 무엇인지, 얼마나 사고가 많이 나는지 따위의 직접적인 영향을 조사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손배·가압류 경험은 그보다는 간접적이다. 손배·가압류가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을 제약하는 장치로 쓰인다는 ‘숨은 의도’를 숫자로 증명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연구할 때마다 속상한 건 당사자들의 비참함을 드러낼 수 있는 숫자와 언어를 골라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사회가 들어주지 않으니까. 그럴수록 설문지 분량이든 내용이든 양보할 수 없었어요. 저희 연구팀이 이 일을 하기로 한 이상, 연구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은 당사자들이 앞으로 이런 아픈 질문을 또다시 받을 일이 없도록 하는 거예요. 자기 상처를 헤집어 세상에 내놓은 사람들이 아주 작게라도 사회로부터 대답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 그래서 이런 일이 헛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파업 노동자에게 손배·가압류로 대응해 노동3권을 무력화하는 방법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한국형 제도’다. 손배·가압류는 돈 대신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가곤 했다. 다시,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한 싸움이 시작됐다. 김승섭 연구팀의 손배·가압류 연구 결과는 10월께 발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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