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 이상적인 정치 세계 유토피아(Utopia)를 꿈꾼 잉글랜드의 대법관이자 정치인 토머스 모어는 교회의 수장령을 거부하다 처형당했다.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자서전〉에 “세례명을 주신 신부님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인물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라고 적었다. 토머스 모어만큼이나 김 전 대통령의 인생은 굴곡이 심했다.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 “겨울을 견디고 꽃을 피우는 인동초(忍冬草) 같았다”라고 말했다.

‘김대중’은 우리 사회의 뜨거운 화두였다. 특히 ‘김대중 죽이기’는 한국 정치사를 관통하는 메커니즘이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을 ‘선생님’으로 추앙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편에는 그를 ‘빨갱이’ ‘지역감정의 주범’ ‘급진주의자’ ‘대통령병 환자’ 등으로 몰아세우는 세력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특히 이 사회 기득권일수록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 많았다. 중앙정보부 고위 간부 최 아무개씨는 “김대중을 잡거나 최소한 괴롭히기만 해도 출세를 보장받았다. 제도권에 있는 사람일수록 반김대중 논리를 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였다. 1970~ 1980년대 대부분을 범법자로 보내며 사형선고까지 받은 DJ를 금기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최씨는 권총을 들고 김 전 대통령을 체포했고, 이를 기반으로 승승장구했다. 

1973년 8월14일 일본 도쿄에서 납치된 뒤 풀려나 동교동 자택에 돌아온 김대중 전 대통령(앞).
살해 위협, 감옥 그리고 망명

‘김대중 죽이기’가 본격 시작된 것은 1971년 대선에서 DJ 바람이 일면서부터다. 1971년 4월 대선은 DJ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비롯한 국가와의 싸움이었다. 김대중 후보가 선거공약을 발표하는 날마다 간첩 사건이 터졌다. 1971년 3월24일 경북에서 간첩 체포. 4월9일 거물간첩 체포. 선거 나흘 전 중앙정보부는 “김대중 후보의 남북교류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의 공약을 북한이 지지했다”라고 발표했다. 정래혁 국방부 장관은 “예비군 폐지는 김일성 남침 촉진을 유도하는 이적행위다”라고 말했다.

대선에서 DJ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패했다. 하지만 차세대 지도자라는 DJ의 후광은 영남 패권주의자들에게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중앙정보부 제1차장으로 근무했던 강창성 전 한나라당 의원은 “원칙대로 투·개표를 했다면 우리가 졌을지도 모른다”라고 증언했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1971년 대통령 선거를 통하여 박 정권을 실제적인 위협으로 몰아넣었던 김대중은 체제에 대한 강력한 도전자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국가 권력의 집중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1971~1987년은 DJ 인생의 암흑기였다. DJ를 제거하려는 공작이 이어졌다. 6년간 투옥됐고 10년간 55회 가택연금을 당했다. 첫 고비는 1971년 5월에 당한 교통사고였다. 전남 목포에서 총선 지원유세를 마친 DJ의 자동차는 중앙선을 넘어 돌진하는 14t 덤프트럭을 피하려다 논에 처박혔다. 이 사고로 DJ는 골반을 크게 다쳐 지팡이를 들어야 했다. 사고 트럭이 공화당 의원 소유였다는 게 밝혀졌지만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위기는 계속됐다. 1973년 8월 DJ는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됐다. 요원들은 DJ를 살해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자, 대북공작선 용금호에 태워 대한해협에서 수장하려 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개입으로 DJ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서거 직후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김 전 대통령이 제임스 본드가 등장하는 007 소설의 한 페이지에 나올 법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았다”라고 보도했다. 2007년 10월 국정원 과거사건진상규명위원회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최소한 묵시적 승인이 있었다고 밝혔다.

1971년 5월 김 전 대통령의 자동차가 14t 덤프트럭을 피하려다 논에 처박혔다.
납치 사건 이후 DJ는 동교동으로 돌아왔지만 바로 가택연금과 징역살이를 번갈아 해야 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되면서 DJ에게 봄이 오는 듯했다. 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신군부는 1980년 5월18일 DJ에게 총을 겨누었다. 군부는 광주 민주화운동이 DJ의 지령에서 시작됐다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했다. DJ는 군사재판 1·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이 구명운동을 벌여 DJ는 목숨을 건지고 미국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다.

1981년 1월25일 당시 ‘김대중 사건의 청산’이라는 제목의 조선일보 사설이다. “김대중 사건은 전두환 대통령의 감형 조처로 일단 원만한 끝막음을 보게 되었다. … 더 중요한 것은, 이 감형 조처가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통치체와 그 지도자의 폭넓은 금도와 포용력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 뉘우치는 자에게 너그러운 용서를 베푸는 것이야말로 다스림 중에서도 가장 차원 높은 경지인 것이다.” 이 사설은 〈조선일보 명사설집〉에 실려 있다.

1985년 귀국해 민주화의 봄을 이끌었지만 DJ는 군사정권과 패권 세력이 쳐놓은 덫과 평생을 싸워야 했다. 그를 지독하게 괴롭힌 것은 빨갱이라는 낙인이었다. DJ는 자신의 책 〈평화로 가는 길〉에서 “박정희씨가 유신을 원치 않으면 통일을 원치 않는 것으로 인정하겠다고 했다”라고 썼다. DJ가 독재에 항거하거나 통일을 외치면 공산주의자가 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선거 때만 되면 언론은 사상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색깔론을 덧칠하기에 바빴다. 대선 직전인 1997년 12월11일 중국 베이징에서 재미동포 윤홍준씨가 기자회견을 가졌다. “김정일이 보낸 선거자금이 김대중 후보에게 전달됐다”라는 내용이었다. 김일성의 꿈은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며, 김일성의 육성 녹음이 비밀 보고서에 담겨 있다는 내용의 김대중 X파일도 이어 나왔다. 여기에 ‘오익제 편지’ ‘김병식 편지’ ‘이대성 파일’…. 선거 때면 언론은 DJ와 관련해 사상 의혹들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그 의혹들은 거의 국가안전기획부(중앙정보부의 후신)의 공작으로 밝혀졌다. 북풍 공작에 뒷돈을 댔던 권영해 전 안기부장을 비롯해 안기부 전 1차장, 대공수사실장 등 안기부 고위 간부가 줄줄이 구속됐다.

DJ에 대한 색깔론은 그 뿌리가 깊고 넓다. DJ는 측근들을 ‘동지’라고 불렀다. 즐겨 사용하던 ‘동지’ ‘대중’ ‘민중’이라는 단어조차 북한을 추종하는 증거가 됐다. 그가 주장한 공화국연방제는 북한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방안과 비슷하며, DJ가 세운 아태재단은 북한의 아태평화위원회와 이름이 비슷하다고 매도당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나중에 그런 용어를 그대로 쓸 줄 귀신이 아닌들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었겠는가? 용어만 가지고 용공이라고 뒤집어씌운 것은 정말 부당하다”라고 말했다.

1996년 12월 중앙일보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윈(WIN)〉은 ‘5공 신군부의 김대중 죽이기 언론공작 전모’를 보도했다. 1980년 7월20일 배포된 이 홍보 문건은 DJ를 ‘북괴와 통하는 공산주의자이며 폭력주의자’라고 서술하고 있다.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는 “김 대통령이 정치활동을 못한 16년 동안 군인과 대한민국의 공무원을 총동원해서 김대중은 빨갱이라고 교육했다. 중학교 미술교사인 집사람도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교육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1949년 남로당에 가입하고 반란을 꾸민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좌익 행위에 대한 비판은 언론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과 대비된다.

DJ라면 무조건 색안경

빨갱이라는 굴레만큼이나 DJ를 괴롭힌 것은 지역감정의 골을 깊게 팠다는 비난이다. 1990년 11월 국회 대표연설에서 DJ는 “박정희씨의 최대의 죄악, 영원히 역사에 용서받지 못할 죄악,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죄악은 이 지방색의 조성이다”라고 말했다. DJ는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측이 만들어낸 지역감정에 발목 잡혀 대권을 놓쳤다. DJ는 지역감정의 최대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호남의 확고한 지지에 힘입어 다시 일어섰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보수 언론은 3김이 지역을 볼모로 토호정치를 한다는 비판에만 천착한다.

1987년 김 전 대통령이 54번째 가택연금을 당하자 동교동계 인사들이 연금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1987년 대선에서 YS와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자 비난의 화살은 DJ에게 쏟아졌다. DJ가 YS를 지지했다면 지역감정 구도를 넘어섰을 것이라는 가설을 바탕에 두고 있다. 비단 수구 기득권만의 비난이 아니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자신의 책 〈97년 대선 게임의 법칙〉에서 “‘전라도 혐오증’ 또는 패권적·반사적 ‘지역주의’는 ‘반김대중 정서’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라고 적었다. DJ는 “당시 여론은 단일화 실패의 책임을 나에게만 돌렸다”라고 괴로워했다.

호남의 정서는 지역적 패권적 지역주의가 아니라 저항에 가까웠다. 특정 지역에서 20년 넘게 한 사람에게 90% 넘는 몰표를 던졌다는 것은 지역정치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일이다. 한화갑 전 대표는 “표가 적은 지역은 지역주의를 조장해서 대결하면 무조건 불리하다. 무슨 이득이 있다고 DJ가 지역감정을 조장하는가”라고 말했다.

DJ에 대한 가장 흔한 비방 중 하나는 대통령병 환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 자리를 지키기 위해 18년간 독재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12년간 독재한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서 이러한 비난은 없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언론이 DJ를 반대만을 일삼는 과격한 사람으로 묘사한 측면도 있다. 김 전 대통령 서거 후 영국의 BBC 방송은 “군사정권이 지배하던 수십년 동안 한국에서 위험한 급진주의자로 통했다”라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은 1991년 6월23일 ‘김대중 총재의 거취’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그의 정치는 반대와 공격, 타협과 술수로 대변된다. 그는 반대와 강성을 선명의 지름길로 삼아왔다”라고 적었다. 조선일보가 독재세력과 군사정권이 과격하다고 지적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독재세력과 군사정권에 항거한 것을 두고 반대와 강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서거 직전까지 김 전 대통령이 부르짖은 것은 민주주의와 남북 화해였다. 이를 가로막는다며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한동안 거두었던 DJ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는 ‘김대중씨’라고 호칭했다.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을 지지하는 모임인 ‘전사모’는 “김대중씨는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자살을 하라”는 성명을 냈다.

DJ 죽이기에 나선 것은 역시 보수 언론이었다. 지난 7월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은 김 전 대통령의 비판이 “노정치인으로서는 타락한 모습이었고,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금도를 넘어선 일탈이었다”라고 썼다. 김 고문은 DJ에 대한 인신공격도 빼놓지 않았다. “DJ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한때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던 추종자들을 용도가 폐기되면 가차 없이 버렸다.”

동아일보는 “민중을 선동하는 것은 민주화 역사를 역류하는 죄짓기임을 DJ는 깨달아야 한다”라고 적었다.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은 사경을 헤매는 김 전 대통령에게 반드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남긴 국가적 갈등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중앙일보 문창극 대기자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비판이 비자금 문제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문 대기자가 근거로 삼은 〈월간조선〉 기사는 법원과 검찰에서 근거 없다고 결론이 난 내용들이었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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